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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탐험7] 거인의 인도에 온전히 내 몸을 - Grand to Grand Ultra 2012
기사입력 2015-07-17 08:33   최종편집 LBMA STAR
작성자 김경수 오지레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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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동안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 제목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처럼 좋은 사람도 있었고, 두 번 다시 만나기 싫은 나쁜 놈도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이해 못 할 이상한 놈도 있었다. 간혹 실의에 빠질 때 조금만 더 힘내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사람도 있지만 격려랍시고 제 실속을 위해 재촉하는 놈도 있고, 그냥 지켜봐 주는 사람도 있다. 뛰는 건 혼자지만 혼자서 버틸 수 없는 곳이 사막이다.

 

 

2012년 9월 23일 아침, 콜로라도 강이 도도히 흐르는 미국 유타주 그랜드캐니언(Grand Canyon) 북동쪽 시온 캐니언(Zion Canyon) 대협곡에 18개국에서 84명의 선수들이 모였다. 고도 1586m 협곡 주변에 솟아오른 황갈색의 바위들은 오직 흙과 바람과 물 그리고 오랜 세월이 빚어낸 걸작들로 거대한 숲을 이뤘다. 가히 신들의 정원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잠시 후 협곡을 진동하는 총성과 함께 5박 7일간 271km의 질주가 시작됐다.

 

 

레이스 첫째 날(50.7km), 장비와 식량으로 꽉 찬 배낭이 어깨를 짓눌렀다. 나는 대자연과 대적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단지 잠시 품고 싶은 소박한 욕심뿐이었다. 그런데 협곡을 기어올라 초원을 달리는 내내 세찬 바람과 굵은 빗줄기가 퍼부었다. 천둥 번개까지 요란하게 번뜩였다. 번개를 피하기 위해 가시덤불을 헤치고 고랑에 몸을 웅크렸다. 기세등등하던 선수들도 주로에서 뿔뿔이 흩어져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기에 급급했다. 가슴이 떨려 가혹한 여행을 왔지만 두 다리가 먼저 후들거렸다.

 

 

레이스 둘째 날(46.1km), 8명의 선수들과 무리지어 CP1에서 CP2로 이어진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 갈림길에서 그만 주로를 이탈했다. 모두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에 취해 몸을 흔들며 달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백주대낮에 1시간 가까이 길을 잃은 것이다. 나는 우왕좌왕하는 초보 선수들을 챙기며 벗어난 주로를 찾으러 2시간 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초주검이 되었다. 게다가 초지에서 다시 만난 빗줄기에 흠뻑 젖은 후엔 몸 안의 에너지가 모두 방전되어 버렸다.

 

 

레이스 셋째 날, 무박 2일의 롱데이 코스(75.8km)는 수직 절벽을 기어오르면서 시작됐다. 주변 산야와 인근 마을을 넘나들며 한나절을 보냈다. 어제 받은 후유증으로 몸은 회복 불능상태에 빠졌다. 밤 12시, 사하라보다 거친 사막 한가운데서 홀로 길을 헤맸다. 추위와 공포 속에 방향을 잃고 흐느적거렸다. 코요테까지 무리지어 주변을 맴돌며 으르렁거렸다. 체념이 더할수록 정신이 몽롱해졌다. 죽음의 문턱을 보았다. 흐릿한 의식에도 조난을 당하면 이런 고통을 겪다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머리털이 곤두섰다.

 

 

밤새 거대한 사막의 늪을 허덕이다 새벽녘 하늘거리는 모닥불을 쫓아 CP7에 도착해 쓰러졌다. 꿈속에서 사방에 흩날리는 눈발이 내 어깨 위에 쌓였다. 누군가 조심스레 몸을 흔드는 게 느껴졌다. 눈을 뜨니 걱정스레 나를 내려다보는 이무웅 님의 얼굴이 보였다. “경수 씨, 괜찮아?” 그 말을 듣는 순간 꼬질한 땟국이 섞인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지금 내 앞에 일흔을 넘긴 왜소한 노인이 있어 감사했다. 지난밤 홀로 겪은 일을 거침없이 쏟아내자 어르신은 안쓰러운 듯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경수 씨, 많이 힘들었겠네. 괜찮아. 잘 견뎌냈잖아.”

 

 

“경수 씨, 내가 같이 가줄게. 쉬엄쉬엄 가보자구.” 어르신은 자신의 기록을 포기하고 내게 보조를 맞춰 동행 길에 섰다. 우리는 CP7을 벗어나 CP8을 향했다. 내 체력으로 어르신과 보조를 맞추는 건 무리였다. 잠에 취해 얼마 가지 못해서 그만 주저앉았다. “어르신, 아무래도 전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냥 먼저 가세요.” 당신의 발목을 잡는 게 너무 미안했다. 하지만 어르신은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봤다. “그래, 내가 봐도 경수 씨가 많이 힘들어 보이네. 그래서 나는 자네와 함께 가야겠어. 여기서 잠깐 쉬었다 가지.”

 

 

살다보면 재촉하는 사람도, 재촉당하는 사람도 서로 괴로울 때가 있다. 그러다 어느 한 쪽이 이제 그만 각자의 길을 가자고 제안하게 된다. 하지만 어르신은 나를 재촉하지도, 내버려두고 떠나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지쳐 힘들어 하면 함께 쉬고, 지루할까 말벗이 되어주고, 가끔 간식을 집어줄 뿐이었다. 새벽 6시부터 시작된 그와의 동행은 오전 11시 30분 함께 캠프에 들어오면서 막을 내렸다. 이제껏 사막에선 다른 선수들에게 도움을 줄지언정 받아본 적 없던 나였다. 심지어 시각장애인을 인도하며 사지를 넘나들던 내가 70세 고령의 어깨에 기대어 롱데이 27시간의 사투를 무사히 마쳤다.

 

 

어제 살아남은 자만이 오늘 다시 주로에 섰다. 원대한 목표는 필요 없다. 온전히 다음 CP에 도착하는 것뿐이다. 레이스 6일째(41.3km), 나는 브라이스 캐니언(Bryce canyon)의 진수를 봤다. 온 대지는 바람과 시간의 오랜 담금질로 솟아오른 수천 개의 첨탑(*Hoodoo)들로 넘쳐났다. 정교하게 깎아놓은 듯한 군상들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와 이집트 고대신전을 연상시켰다. 고난의 시기를 잘 견뎌내면 그에 걸맞은 소중한 결실이 주어진다. 대자연의 걸작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건 보상을 넘어 큰 행운이었다.

 

 

삶은 홀로 싸우는 것 같지만 누군가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 “어르신이 아니었으면 전 그랜드캐니언에서 결승선을 밟지 못했을 겁니다. 다 어르신 덕분입니다.” 그랬더니 어르신은 “경수 씨, 내가 뭘 해 준 게 있다고 그래. 그냥 기다려준 것밖에 없는데. 허허허.” 그냥 기다려준다는 것. 이것에 그런 큰 힘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껏 모르고 살아왔다. 격려는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냥 기다려 주는 것이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그랜드캐니언 레이스 : www.g2gult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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